국제갤러리는 화가 박미나(MeeNa Park)의 개인전 를 개최한다. 1996년 첫 개인전을 열며 데뷔한 박미나는, 2002년 쌈지스페이스 작가 거주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이래,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며 21세기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중견 미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통산 9번째 개인전이고, 국제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는 2004년의 3인전- <정수진, 박미나, 스티븐 곤타르스키>와 2008년의 2인전 - 에서 박미나의 신작을 선뵌 바 있다.) 화가는 1999년 이래 ‘집(House)’, ‘스크림(Scream)’, ‘색상 회화(Color Collecting)’, ‘딩벳 회화(Dingbat)’ 연작을 지속해왔는데, 공통된 특징은 ‘기존에 존재하는 도상을 조합해 괴상한 다이어그램을 구성하고, 자신이 수집한 물감에서 추출한 특정한 색상 팔레트를 그 다이어그램에 적용한다’는 점이다. 대개 박미나의 작업은 자신이 ‘사이비 과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연구·조사 활동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정보를 수집하고, 재구성하고, 상이한 정보를 중첩시켜, 회화의 물리적 형식을 귀결 지을 때, 작가는 자신이 작업 초기에 설정한 간단한 법칙을 준수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눈앞의 스킨 너머에 축적된 작업 과정과 차용된 문화적 맥락을 독해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일종의 기호 게임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개인전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번에 처음 선뵈는 ‘BK(블랙) 회화’ 6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딩벳(Dingbat) 회화’ 15점이며, 나머지는 ‘색칠 공부 드로잉’ 200점이다. 이 가운데 전시의 주력은, (2007년 시작된) ‘딩뱃 회화’ 연작이다. 미술 평론가 임근준은 박미나의 ‘딩뱃 회화’ 연작을 이렇게 논했다. “딩뱃(dingbat)은 “인쇄물에 흔히 쓰이는 형상을 쉽게 문자와 조합할 수 있도록 활자 형태로 제작한 물건”이다. 그런데, 오늘 디지털화된 딩뱃은 키보드의 문자 배열에 맞춰 한 벌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딩뱃 글꼴(font)을 선택해놓고 자판을 두드리면, 각종 약호와 그림 문자 등이 문자 대신 타자된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글꼴을 디자인하는 이들은 인내력이 뛰어나고 다소 내성적인 법이다. 그들은 글꼴을 제작할 때 개성을 표출하는 일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글꼴엔 개인적 감성이나 환상 따위를 투여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하지만, 댕뱃을 만들 때는 좀 다르다. 글꼴의 마이너리그라 할 수 있는 딩뱃을 만들 때, 타이포그래퍼들은 갑자기 이상한 개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따라서 순전히 기능적인 딩뱃도 있지만, 아주 이상한 내용을 담은 딩뱃도 적잖다. 박미나가 최초로 제작한 ‘딩뱃 회화’의 제목은 <ㅠㅛㄷㅗㄷㅣㅣㅐㄴㅐㄱㄱㅛ>다. 어떤 딩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글 자판의 “ㅠㅛㄷㅗㄷㅣㅣㅐㄴㅐㄱㄱㅛ”를 차례로 누르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그림과 웃지 않는 스마일리가 나왔던 모양이다. 그는 캔버스에 그렇게 출력된 딩뱃 이미지를 확대·전사해 일종의 다이어그램을 구성했다. 그리고 특정한 색채를 적용해 그림을 완성했다. 화가는 물감을 모으는 수집벽이 있는데, 작품에 색상을 구현할 때, 물감을 섞지 않고 특정 조합을 구성해 적용하는 유형학적 분류의 습관이 있다. 고로, 물감을 기준으로 보자면, 딩뱃으로 만든 다이어그램은 수집된 물감의 데이터베이스에 조응하는 스킨(skin)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 혹은 스와치(swatch)로 기능한다. 그런고로, 박미나의 ‘딩뱃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한 매트릭스(matrix)를 겹쳐 헛의미의 기계를 구축하는 일인 듯싶다. 우선, 자판의 문자 배열이라는 매트릭스와 그에 기계적으로 맞춰져있는 딩뱃이라는 매트릭스가 주요한 한 차원을 이룬다. 그리고, 레디메이드(readymade) 형태로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감의 체계라는 매트릭스가 그에 중첩되는 한 차원이 된다. 그런데 화가는 딩뱃으로 화면을 짜는 과정에서 점차 복잡한 층위(layer)를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결과물은, 제프 쿤스(Jeff Koons)의 회화 연작 <이지펀-이더리얼(Easyfun-Ethereal)>처럼 상호 무관하면서도 유관한 이미지들이 서로 엎치고 겹치는 괴이한 형상이 됐다. 2007년 개인전 <홈스위트홈(Home Sweet Home)>(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첫 선을 뵌 ‘딩뱃 회화’ 연작은 대부분 해독이 불가능한 제목을 달았더랬다. 하지만, 알파벳으로 구성된 제목을 자판으로 두드려보면 특정한 의미가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형 아크릴 회화 은 “씨발놈”이 된다. 허나, 작가는 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화가가 유사 문자적 의미체계를 구성해놓았으나, 해묵은 예술가들의 낭만적 두 편향 -- 새로운 의사소통의 구조를 창출하려는 의지와 기계적으로 대입한 체계들 사이의 충돌로부터 시적인 매력을 뽑아내려는 의지는,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거세됐다. 물론, 딩뱃의 표상과 제목의 헛된 메시지 사이에 일말의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에서 작가는, 누르면 야릇한 자세의 ‘그라비아’ 미녀들을 실루엣 이미지로 출력하는 딩뱃을 사용했다. 이 작품에서 또 다른 중요한 도상으로 기능하는 것은, 열쇠 구멍 모양의 딩뱃과 각종 약호로 구성한 만다라(mandala)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만다라는 항문이 되고, 열쇠 구멍은 음문이 된다. 그러니 이 작업의 내용은, (도상해석학적으로 풀이하면) 포르노에 다름 아니다. 고로, 그림 자체가 “씨발놈”인 셈이다. 이러한 직해주의(直解主義, literalism)와 도상해석학적 함정(iconographic trap)은 분명 작가가 의도적으로 장치한 바다.” 이번에 공개하는 신작 ‘딩뱃 회화’는 제목이 모두 숫자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고, 적용한 색상은 CMYK라는 인쇄의 기본 색상과 RGB라는 빛의 3원색에 근접하는 물감들을 수집한 결과다. CMYK와 RGB 외에도 색상표가 제시하는 기본색에 근접하는 물감들을 사용했다. 라는 다소 암호 같은 전시 제목은 이러한 기계적 작업 방식을 지시한다. 반면, ‘BK(블랙) 회화’는 특정한 물감의 조합을 지속적으로 캔버스에 덧발라 만든 검정 톤의 그림으로, 일종의 모노크롬 추상 회화다. 이론적으론 완전한 검정이 나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적용한 물감에 따라 도출된 암회색의 종류도 다르다.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노랑, 빨강, 파랑, 녹색 이렇게 4가지 색상을 11가지 크기의 동그라미 자로 반복해서 덧칠하는 것으로, 듣기엔 간단하지만, 노동 강도가 매우 높다. 첫 번째로 제작된 ‘BK(블랙) 회화’ 0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은 물감 회사별로 제작됐고, 11가지 크기의 동그라미를 반복하는 순서도 제각각이다. (비고: 1번은 브레라, 2번은 골든, 3번은 슈민케, 4번은 페베오, 5번은 르프랑 & 부르주아 사의 물감으로 제작됐다.) 갤러리 2층을 차지한 200점의 ‘색칠 공부 드로잉’ 연작(1997-현재 진행 중)은 아이들에게 숫자와 언어를 가르치는 색칠공부 밑그림에 개념적 낙서를 덧그린, 다소 어린아이 장난 같은 작품이다. 다음은 다시 평론가 임근준의 설명이다: “(‘색칠 공부 드로잉’의) 작업과정은 간단하다. 우선 낱장의 밑그림을 분석해, 각 도안이 동원하는 사회적 관념들을 포착한다. (색칠공부의 도안에는, 아이들의 머리에 주입하기 위한 ‘사회적 소통의 기본이 되는 수리 개념’, ‘색상이 지니는 문화적 상징’, ‘문자의 사회적 의미’ 등이 레디메이드의 형태로 준비돼 있다.) 이어 작가는 그 의미를 숙고한 뒤, 이리저리 바꾸거나 다른 의미를 덧붙여 만든 자신만의 새로운 도안을 겹쳐 프린트함으로써 원래의 조합을 전혀 다른 차원, 즉 (사회적 기본 단위에 새로운 패턴을 부여하는) 개념적 회화로 간단히 변질시킨다.”